증언빈딘성 빈안학살 유가족 팜티흐엉

202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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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팜티흐엉(Phạm Thị Hường), 1948년생

▶ 1966년 2월 15일(양력), 2월 26일(양력),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빈안학살(Vụ thảm sát Bình An, xã Tây Vinh, huyện Tây Sơn, tỉnh Bình Định)  유가족

▶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19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떠이빈사(구 빈안사)의 15개 지점에서 모두 1,004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팜티흐엉(당시 18세)은 이 빈안학살 중에서 까인브엄 들판 학살(2월 15일)과 고자이학살(2월 26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여동생과 10여 명의 친인척을 학살 피해로 잃었다.
    전쟁 당시 그의 가족은 빈안사의 안빈촌에 살았다.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 일찍 병사했고 1966년 경에는 할머니 당티쩜(약 50~60세)과 여동생 팜티란(14세)과 마을에 함께 살았고 오빠 팜머이(26세)는 당시 남베트남군의 병사로 마을을 떠나있었다. 
    2월 15일(까인브엄 들판 학살) 새벽 6시 경, 마을로 들어온 한국군이 지역의 유격대들과 교전을 벌였고 피해를 입었다. 이후 한국군이 집 곳곳을 수색했는데 당시 할머니 당티쩜은 마을 밖의 시장에 있었고 마을에 있던 팜티흐엉과 여동생 팜티란은 각각 다른 곳에 있다가 한국군이 들이닥친 것을 알고 방공호로 몸을 숨겼다. 팜티흐엉은 너무 무서워 집에 있던 여동생을 찾으러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다른 주민들의 손에 이끌려 근처에 있던 마을 유격대의 방공호로 들어갔다. 그곳은 잘 위장된 방공호로 한국군에게 발각되지 않아 팜티흐엉과  5~6명의 주민들은 목숨을 구했으나 집의 방공호에 있었던 여동생 팜티란을 비롯한 다른 주민들 65명은 한국군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한국군은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 한 곳으로 모아 죽이기도 했고 방공호 안에 있던 사람들을 그대로 총과 수류탄으로 사살하기도 했는데 여동생 팜티란과 친인척 10여 명(친척 여동생 팜티떰(8세), 고모 팜티트아와 그의 자녀들 등)은 방공호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국군이 마을을 떠난 오후 6시 경 팜티흐엉은 방공호에서 나와 다른 주민들과 함께 여동생과 친인척들의 시신을 밤새도록 수습하여 집 근처에 매장했다. 
     2월 26일(고자이학살), 팜티흐엉은 또 한번의 위기를 겪는다. 2월 21일과 마찬가지로 한국군이 아침부터 마을로 들이닥쳐 집들을 수색했다. 팜티흐엉은 며칠 전 몸을 피했던 마을 유격대의 방공호를 생각했으나 그곳으로 도망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근처에 있던 방공호로 몸을 숨겼다. 당시 삼촌 팜쏘아이(25세)는 팜티흐엉이 숨었던 마을 유격대의 방공호에 몸을 숨겼다가 한국군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고 팜티흐엉이 있던 방공호는 발각되지 않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당시 고자이학살 피해 규모(380명)가 매우 컸는데 팜티흐엉은 너무 무서워 삼촌이 있는 곳까지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피해 이후 팜티흐엉과 할머니 당티쩜은 피난 길에 올라 안전지대로 불린 떠이선현의 푸퐁, 빈케 등의 지역을 거쳐 뀌년시에서 피난민 생활을 했다. 그는 할머니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는데 한동안 꿈속에서 끊임없이 총을 난사하며 사람을 죽이는 한국군의 악몽에 시달렸다. 현재 남편과 함께 뀌년시에 머물고 있는 팜티흐엉은 매년 2월 26일에 열리는 빈안학살 위령제 참석을 위해 고향을 방문한다. 그는 “오래전 일이지만 한국군이 정말 사람을 많이 죽였지. 나는 그저 진실을 말할 뿐이야. 이제 더는 한국군에 다른 감정은 없어”라며 현재의 심정을 전했으며 재단이 보여준 빈안학살 희생자 명단에서 수십년간 이름을 잊고 지냈던 팜씨 성의 친인척들을 발견하고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오빠 팜머이는 현재 안빈촌에 거주하고 있다. 

▶ 증언 출처: 2020년 12월 22일, 2020년 12월 23일 팜티흐엉 인터뷰(진행: 흐아흐우응이)

▶ 사진: 2020년 12월 21일, 한베평화재단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