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꽝남성 하미학살, 하꽝학살 유가족 레꽁띤

▶ 레꽁띤 (Lê Công Tín), 1954년생
▶ 1968년 1월 26일(음력)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학살과 1968년 2월 2일(음력) 디엔즈엉구 하꽝학살 유가족
▶ 레꽁띤(당시 15세)은 하미학살 피해로 친누나 레티타이(28세)를 잃었고 이후 하꽝학살에서는 할아버지 레꽁라인(약 77세)을 잃은 유가족이다.
레꽁띤의 가족은 하지아 마을에 살았는데 1968년 초에 누나 레티타이가 결혼을 하여 하미 마을로 이주하여 살다가 그해 1월 26일(음력)에 한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로 목숨을 잃었다. 사건 이후 며칠 뒤 레꽁띤과 가족은 하미학살과 레티타이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주민들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하미학살 사건 당시 레티타이를 포함한 10여 명의 여성은 다른 희생자들처럼 특정 장소에 모여 집단학살 당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끌려가 강간을 당한 후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2월 2일(음력) 하꽝학살이 발생했다. 이른 아침에 레꽁띤은 바닷가 쪽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한국군을 먼 곳에서 봤다. 그들은 집집마다 수색하지 않고 길을 따라 곧장 마을로 들어왔다. 행군 중에 한국군은 주민을 만나면 무조건 잡아가려고 했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바로 사살했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레꽁띤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했다. 한국군이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근의 하반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할아버지 레꽁라인 혼자 남아 있었다. 한국군이 할아버지를 다른 집으로 끌고 가려 했는데 할아버지가 이를 거부하자 사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군은 주민들을 하꽝 마을의 사당으로 끌고 가 집단사살하고 시신과 함께 사당을 불태웠다. 현재 건립되어 있는 하꽝학살 위령비에는 집단학살 희생자 명단만 기록되어 있고 레꽁라인처럼 곳곳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이름은 빠져있다.
학살 피해 이후 레꽁띤은 부모와 함께 피난민 생활을 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1년 뒤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미군에게 사살당하고 만다. 그는 고향을 떠나 디엔응옥으로 피난을 갔으나 그곳도 전황이 급박해져 결국 다낭으로 피난을 갔고 1975년 전쟁이 끝난 후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1976년에 지금의 아내 팜티뜨와 결혼했는데 그 역시 하꽝학살 유가족이다.
레꽁띤은 한때 한국군에게 강한 증오심을 가졌지만 지금은 자신과 아내 같은 유가족을 한국 사람들이 찾아오면 기쁨을 느낀다. 당시의 일은 이전 세대였던 한국군이 저지른 일이며 오늘날 찾아오는 한국 사람들은 과거의 일에 공감하여 자신들을 찾는 것이므로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고 있다고 밝혔다.
▶ 증언 출처: 2024년 8월 20일, 8월 29일 인터뷰(진행 도안당땀바오)
▶ 사진: 2024년 7월 28일, 몽투투평화여행
▶ 꽝남성 하미학살 위령비, 꽝남성 하꽝학살 위령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