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꽝남성 응우옌탭 할아버지 집, 마당, 방공호 학살 유가족 레티히엔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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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티히엔 (Lê Thị Hiền), 1954년생

▶ 1969년 10월 03일(음력),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1촌 응우옌짜이 할아버지 집, 마당, 방공호 학살(Vụ thảm sát tại hầm, vườn và nhà ông Nguyễn Thép, thôn 6, xã Bình Dương, huyện Thăng Bình, tỉnh Quảng Nam) 유가족

▶ 1969년 당시 레티히엔(당시 15세)은 할머니 후인티뚱, 언니 레티띠엔과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세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다. 1969년 당시 한국군이 빈즈엉사에 자주 나타나지는 않았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자주 마을을 수색했는데 그들은 한국군처럼 주민들을 함부로 죽이진 않았지만 여성들을 자주 강간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사건 당일 한국군이 마을로 들이닥친 그날 오전, 하늘에 헬리콥터가 날아다니자 주민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미군일거라 생각했고 레티히엔의 가족들과 여러 주민들은 응우옌텝 할아버지 집의 방공호에 몸을 숨겼다. 빈즈엉사 6촌으로 진입한 한국군이 방공호에 있던 주민들을 발견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해 54명의 주민들을 학살했고 두 세 채의 집을 불태운 후 마을을 떠났다. 당시 학살 피해로 할머니 후인티뚱(약 8-0세), 친언니 레티띠엔(약 26-27세) 그리고 신생아였던 레티띠엔의 남자 아기(생후 약 1개월)이 목숨을 잃었다. 시신을 수습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레티띠엔의 아기는 몸에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학살 때 죽지는 않았지만 이후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해 방공호에서 굶어 죽은 것이라 주민들은 생각했다. 
  사건 당일 다른 가족과 달리 레티히엔은 방공호로 가지 않고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 이전에 미군이 마을을 수색했을 때 미군이 레티히엔을 강간하려 하자 할머니가 격렬히 저항해 풀려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사건 당일 레티히엔이 또다시 강간당할 것이 두려워 그에게 마을 밖으로 달아나도록 했다. 레티히엔은 하럼 시장으로 달아나다가 남베트남군에 붙잡혀 시장의 감옥에 2개월간 갇혔다 풀려났다. 감옥에 있을 때 레티히엔은 가족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해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을 정도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레티히엔은 남쪽의 땀끼(현 꽝남성의 성도)로 갔다. 고향에는 기거할 곳도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어 도시인 땀끼에 살며 청소, 요리, 장사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그곳에서 2년을 지냈다. 이후 레티히엔은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전쟁 중에 헤어졌던 큰 아버지 레만을 우연히 만나 그가 살고 있는 다낭으로 가서 살았고 그의 소개로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그는 4명의 아들과 딸을 낳아 키웠다. 그가 35세였을 때 어부로 일하던 남편이 바다에서 어선이 뒤집혀 세상을 떠나 이후에는 홀로 자식을 키우며 힘겨운 삶을 살아야했다. 현재 그는 빈즈엉사 6촌에 혼자 살고 있으며 닭, 돼지 등을 키우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유가족인 자신에게 전쟁 피해 보상의 차원에서 조금이나마 경제적 지원을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 증언 출처: 2019년 8월 26일 인터뷰(진행 팜티카인리), 2024년 8월 20일 인터뷰(진행 도안당땀바오)

▶ 사진: 2024년 8월 14일, 레티히엔 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