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베트남(2017.12~2018.4)
기억 하나, 나는 베트남에 마음의 빚이 있어요
“저는 여행 작가입니다. 다낭 여행을 하던 중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의 흔적을 만났어요. 위령비와 증오비를 보고 놀랐어요.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만들며 베트남 전쟁을 알고, 한국군 참전의 비극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어요.”
“우리는 학교에서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어요. 대학에서 공부하며 이 문제를 만났을 때 내가 배운 역사에 대한 배신감이 크게 다가왔어요.”
“아버지가 참전군인이세요. 아버지가 왜 술과 담배로 인생을 탕진하셨는지 잘 몰랐어요. 베트남 전쟁이 아버지를 통해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어요.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지금도 전쟁을 만납니다.
기억 둘, 우리를 왜 죽였나요?
“당신도 보여줘 봐”
201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생존자 런 아저씨와 탄 아주머니. 전쟁 당시 15세, 8세였던 두 분은 당시 입었던 큰 상처가 여전히 온 몸에 남아있습니다. 건강검진을 위해 녹색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런아저씨가 바지를 쑥 걷어 올립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다리 곳곳에 손톱만한 크기로 움푹 패인 곳이 많습니다. 수류탄 파편이 박혔던 자리입니다. 그때 다 빼내지 못한 수류탄이 온 몸을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도 런 아저씨는 통증에 잠을 못 이룰 때는 고통을 잊기 위해 마을을 달립니다. 부끄러워하던 탄아주머니도 허리춤을 들썩이더니 옷을 들어 하얀 배를 보여줍니다.
“아! 이게...”
배 한 가운데로 길게 살이 접혀 상처를 덮고 있습니다. 여덟 살 소녀의 작은 배에 났던 큰 상처는 쉰을 넘긴 아주머니의 배에 세월로 남았습니다. 전국을 돌며 학살을 증언했던 아주머니는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우리를 왜 죽였나요?"
기억 셋, 한국 정부가 사과했어요!?
10월 초, 추석 연휴를 앞둔 전날 밤.
느긋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펼치고 ‘귀성길’ ‘명절 TV영화’ ‘차례상’과 같은 검색어 사이에 발견한 기사는 “베트남엔 한국이 가해국...잘못 인정해야”라는 기사였습니다. 큰 포털 사이트 두 군데 모두 ‘많이 본 뉴스’ ‘댓글 많은 뉴스’에 올랐습니다. 댓글을 살펴보니 ‘사과’와 ‘반성’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 키워드는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담고 있었는데, 하나는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사과했는데 뭘 또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한국 정부의 사과에 대한 정보가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연휴 전야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베트남 방문 때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고 '양국간 불행했던 과거'를 언급하며 처음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베트남 방문 시 유감을 표명하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얼마 전 한베 수교 행사에서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며 영상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모두 공식적인 사과는 아닙니다.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란 전쟁에 대한 진상규명, 이에 통한 인정과 사과, 책임 있는 조치가 병행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조차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 넷, 침묵의 범죄를 막기 위한 미래의 기억
시민법정 역사의 시작에는 베트남전쟁이 있습니다. 최초의 시민법정으로 기록된 1966년 ‘국제전쟁범죄법정’은 세기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이 조직한 시민법정이었습니다. 당시 러셀은 반인륜적인 베트남 전쟁에 무기력하였던 UN과 국제사회를 비판하며 베트남 전쟁의 책임을 묻기 위한 시민법정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이 법정이 침묵의 범죄를 막을 수 있기’(may this tribunal prevent the crime of silence)를 바라며 전 세계의 동참을 호소하였습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고,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