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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읽기[나는 전쟁 '기념'에 반대한다 3화] 한국 청년이 베트남 학살 위령비를 찾아 헤맨 이유 / 궁정욱

2026-06-09
조회수 169


[나는 전쟁 '기념'에 반대한다 3화]

한국 청년이 베트남 학살 위령비를 찾아 헤맨 이유

궁정욱



연간 방문객 300만 명을 넘어선 용산 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의 전쟁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기념시설이다. 그러나 이 공간이 보여주는 국가주의·군사주의적 시각과 반인권적 전시에 대해 시민사회는 오래전부터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으며, 변화의 필요성 또한 꾸준히 이야기되어 왔다. 이번 연재에서는 <전쟁기념관을 바꾸는 시민활동가들의 모임 탄탄이>의 활동과 함께, 전쟁을 '기념'하는 공간을 시민의 힘으로 새롭게 상상하고 바꾸려는 시민·활동가·작가의 이야기를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고교생 시절 역사학도를 목표로 역사에 열정을 쏟았던 필자는 우연한 계기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논란'을 접했고, 한국이 가해국가로서의 역사를 지닌 전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이러한 내용을 정규 교육과정의 역사 수업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껴, 여러 관련 자료들을 참고하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소위 '학살 부정론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왔으며, 국내의 여러 도서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자료 탐색을 하는 와중에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전쟁기념관에는 '전쟁의 교훈'이 있는가


전쟁기념관은 이름 그대로 한반도 역사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전쟁의 역사를 다루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한국군 해외파병의 역사를 다루는 '해외파병실'에서는 베트남전쟁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룬다. 전시관 초입에는 '세계평화'를 목적으로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했다는 문구가 기재되어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파병에 법적 근거가 되었던 당시의 헌법 4조에는,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기존 헌법 제6조에서 국군의 역할을 "국토 수호와 침략적 전쟁의 부인"으로 규정하던 내용을, 박정희 군사정권이 반(反)헌법적인 권력 행사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며 해외파병을 추가로 삽입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국군의 해외파병이 가능한 법적 근거가 없자,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는 헌법을 바꿔 기어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당시의 헌법 개정은 제5차 헌법 개정안 이유서에 "5.16 혁명과업의 수행을 완수하기 위하여"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반민주적이었고, 진정한 '국제평화'와도 전혀 무관했다.


세계평화를 위해 베트남전 파병을 했다고 밝히고 있는 전쟁기념관 전시 문구 앞 <전쟁기념관을 바꾸는 시민활동가들의 모임 탄탄이>의 피켓 액션 ⓒ 한베평화재단

세계평화를 위해 베트남전 파병을 했다고 밝히고 있는 전쟁기념관 전시 문구 앞 <전쟁기념관을 바꾸는 시민활동가들의 모임 탄탄이>의 피켓 액션

ⓒ 한베평화재단


둘째, 대한민국 사법부가 1심과 2심 판결을 통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을 인정했다. 국제인도법의 근간인 제네바협약 중 무력충돌에 관한 의정서에서도 "민간인인지 적군인지 모호할 땐 민간인으로 간주하라"며 민간인 보호 원칙을 밝히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한 파병에 국제인도법을 위반하는 민간인학살이라니, 이 보다 모순된 전시가 있을까.


베트남전쟁 전시관 중앙에 위치한 '채명신 훈령 팻말 모형'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이 훈령은 민간인학살의 진실로 '지켜지지 못한 실패한 훈령'임이 밝혀졌다.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 본인조차도 자신의 회고록에 "총알이 적군만 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면, 민간인도 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전쟁기념관은 집착에 가깝게 이 전시를 고집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이러한 전시는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필자가 민간인학살을 이야기하자 "학살의 증거는 있냐", "학살의 주체가 한국군이라는 증거가 무엇이냐", "소멸시효가 한참 지났는데 법적 근거는 있냐"고 민간인학살을 부정하며 비아냥거리는 지인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정부는 승전국이라 과거사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는 이야기 또한 필자를 지치게 만들었다.


베트남 피해자의 승소, 베트남 유학을 결심하다


2023년 2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인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 님께서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를 쟁취하셨다. 이에 피고 대한민국이 항소하자, 베트남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강도 높은 유감 표명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의 사건은 필자를 크게 고무시켰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의 진전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특히 소송에서 어느 나라 국가배상법을 적용해야할지가 법리적 쟁점인 것에 주목했다. 이번 판결에서는 재판부가 한국의 국가배상법을 적용했지만 다른 피해자·유가족들의 집단소송으로 확대될 경우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과거사 문제가 그러했듯 언젠가는 베트남 국가배상법이 적용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국가배상법 연구가 베트남전 진상규명에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해 베트남 유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필자는 2017년 여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7회에 걸쳐 베트남 중부의 피해 마을을 찾는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유학을 위해 베트남에 건너 온 이후로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헌자료 및 전시물을 찾기 위해 베트남 중남부의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을 답사했다. 여러 학살 피해 지역에 있는 위령비와 집단묘지를 참배하러 다녔던 것까지 합하면, 베트남 피해지역을 약 12회에 걸쳐서 방문했다.


베트남의 한국군 민간인학살 공식기록을 찾아 헤매다


아카이브를 목적으로 각 성(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의 종합 박물관을 방문했지만,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너무나도 적었고, 한국군 민간인학살에 대한 내용은 다낭박물관의 전시된 일부 피해자들의 사진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국립도서관 내의 베트남전쟁 관련 공식 문헌들에서도 한국군 민간인학살 관련 내용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 모든 곳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필자가 방문한 도서관은 회원증을 발급받아도 도서의 외부 반출과 대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발견했을 때에는 민간인 학살을 발견할 단 하나의 가능성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문헌을 다 읽을 때까지 그 지역에서의 답사 일정을 연장하기도 했다.


베트남 유학을 시작한 2023년 2월, 하미학살 55주기 위령제 참배단에 함께해 위령비에 향불을 바치고 있는 필자.

베트남 유학을 시작한 2023년 2월, 하미학살 55주기 위령제 참배단에 함께해 위령비에 향불을 바치고 있는 필자

ⓒ 김창섭·한베평화재단


베트남에선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으로 파병된 '미군의 일부'라는 시각이 주를 이루며, 일부 기록에서는 한국군 또한 미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즉, '한국군' 학살도 '미군의 학살'이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정확히 '남조선군의 의한 학살'이라고 명시된 기록들이 다수지만, 정황상 한국군의 학살로 보여도 '미군의 학살'로 기록된 문헌은 학살의 주체를 정확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떤 문헌에서는 학살 주체를 그냥 '적'이라고만 적은 것도 많았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마침내 한국군 민간인학살을 찾아낸 순간에는 뿌듯함과 동시에 학살 피해자 분들에 대한 가해국 국민으로서의 죄송함과 뼈아픈 감정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분들에게도 응우옌티탄 님처럼 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을 기회가 과연 올 수 있을지, 아직도 갈 길이 먼 현실 앞에서 막막함을 느꼈다.


한국 청년이 위령비를 찾자 유가족들이 몰려들다


문헌조사 외에도, 민간인학살 아카이브를 위해 각 피해마을에 있는 위령비와 집단묘지를 찾아다녔다. 실제로 학살 위령비와 집단묘지들은 피해생존자 혹은 유가족 분들의 생활 반경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참배를 하던 도중 피해생존자 분들을 만나 뵙게 될 수도 있었다. 가해국 국민으로서 피해생존자 분들을 뵙는 일 자체가 그분들의 학살 당시의 트라우마를 재발시키는 일이 될 것 같아, 문헌자료 조사 때와는 달리 마을 답사에는 오랜 시간 망설였다.


그리고 최근 베트남은 행정구역이 통폐합 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지역 당국이 허가 없이는 하미 위령비 참배객에게 출입문을 개방할 수 없다고 하자, 유가족들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찾은 지난 2월 26일 빈안학살 60주기 위령제 때는 행사 일정이 제대로 통보되지 않아 유가족들이 대거 불참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연이은 베트남 행정기관의 부당한 소극행정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학살 관련 장소와 자료, 유가족 분들과의 만남 등에도 제약이 많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더 늦기 전에 위령비와 집단묘지를 모두 방문하여 참배하고, 그 과정에서 유가족 분들을 뵈면 정중하게 증언을 요청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꽝응아이성 카인럼학살 위령비 뒤편에 위치한 희생자 가족묘에 참배하고 있는 필자

꽝응아이성 카인럼학살 위령비 뒤편에 위치한 희생자 가족묘에 참배하고 있는 필자 ⓒ 한베평화재단


위령비와 집단묘지를 다니면서도 혹시나 나를 마주치게 되시면 그분들이 불편해 하시진 않을까 계속 불안했다. 빈딘성 송깐 시장 학살 위령비 그리고 꽝남성과 꽝응아이성의 일부 위령비 근처에서 피해생존자 분들과 유가족 분들을 만났다. 그때 나는 어떤 태도와 언행을 유지해야 할지 몰라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그분들은 내게 한국군이나 한국 정부에 대한 원망을 겉으로 드러내시진 않았다. 다만 그분들이 나로 인해 마음 속 깊은 곳의 트라우마가 재발하시진 않았을까 그게 아직도 염려스럽고 죄송하다.


빈딘성의 한 위령비 근처에서는 많은 유가족 분들과 만났다. 한국 청년이 위령비를 참배하러 왔다는 소식에 폭우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여러 유가족 분들이 몰려오셨다.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는지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셨다. 수도 하노이에서 베트남어를 배운 나는 빈딘성 방언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해된 내용들을 최대한 베트남어로 메모하고 그분들께 재차 여쭤보고 수정하는 확인 과정을 거쳤다. 그곳에 계셨던 유가족 응우옌반따이 할아버지도 역시나 위령제 통보가 늦어진 것에 분개하셨다. 하지만 내겐 찾아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비를 맞아 힘들진 않았는지 친절히 물어봐 주셨다.


사라져가는 전쟁의 기억, 위령비를 찾아 헤매다


위령비 중에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곳들이 있었다. 실제 위치가 구글맵 위치와 다르거나 위령비가 다른 곳으로 이전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을 몇 번 겪다보니, 위령비와 집단묘지를 발견하면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어떤 곳은 등산로도 없는 산 속에 있어서 유가족이나 주민의 안내를 받아야 했고, 심한 곳은 한국군 학살 희생자의 무덤이라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한 경우도 있었다. 일부 유가족 분들은 희생자 무덤의 개보수 지원을 원하셨다. 하지만 비용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전쟁 피해 유가족이 있는 베트남에서 일부 유가족에 대한 외부의 개별 지원은 허가 문제와 형평성 논란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큰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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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남성 반꾸엇 학살 위령비를 찾아 참배를 했다.

최근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위령비를 신축하며 명칭을 쏨바우 학살 위령비로 바꾸었다. ⓒ 궁정욱


붉은 글씨였던 비문이 거의 지워진 호이안의 껌안학살 위령비. 음력 1월 1일 학살 기일을 맞아 한베평화재단에서 보낸 조화와 제사용 과일바구니가 놓였다

붉은 글씨였던 비문이 거의 지워진 호이안의 껌안학살 위령비.

음력 1월 1일 학살 기일을 맞아 한베평화재단에서 보낸 조화와 제사용 과일바구니가 놓였다. ⓒ 한베평화재단


또 오래되어 비문이 풍화된 위령비가 꽤 많았다. 때문에 비문을 이해하기 위해 거의 밀착해 한 글자씩 들여다보며 읽어야 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현재 보이는 글자마저 못 알아보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문장씩 비문을 촬영해가며 비문의 내용을 기록했다. 유가족분조차도 흐릿해진 비문을 읽기 어려워, 나와 함께 한 글자씩 읽으며 해독에 도움을 주셨다.


필자를 데려다 주신 오토바이 택시기사님들도 험난한 길을 맞닥뜨릴 때마다 당황하셨다. 여러 기사님들이 나 대신 길을 물어봐주고, 진흙에 빠진 오토바이 바퀴를 함께 빼내고, 증언을 해줄 유가족을 소개해준 스님과 절밥을 나누어 먹고, 위령비에 향불을 바치는 일에도 함께 해주었다. 어떤 분은 "베트남 사람인 나도 몰랐던 학살 사실을 한국 청년 덕에 알게 되어 참배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는 말씀까지 해주셨다. 학살에 대해서는 베트남 사람들 모두가 마음 아파했지만, 가해국에서 온 후손의 방문은 훈훈하게 맞아주신 것이다.


전쟁기념관, 베트남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언제까지


베트남에서 접한 여러 학살의 기억과 위령비 참배 그리고 아카이빙을 도와주신 유가족 분들의 간절함을 만나고 나니, 일방적으로 한국군의 민간인 보호 역사를 주장하는 전쟁기념관의 무책임함에 속이 문드러질 지경이다. 또한 가해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당한 혈육이 묻힌 무덤의 개보수를 간절히 바랐던 한 유가족 분을 도와드리지 못한다는 현실이 너무도 슬프고 괴롭기도 했다. "못 도와줘도 괜찮아, 이미 오래 지난 일인데 뭐"라고 나를 위로하셨던 그 분의 한 줄 문자 메시지에 가슴이 후벼 파이듯 속상했다.


전쟁기념관은 바뀔 수 있을까. 한국 정부가 진실과 책임을 인정할 그날은 올 수 있을까. 그날이 올 때까지, 마땅한 사과와 피해배상을 받을 권리를 지니신 유가족분들께서 이 세상에 버텨주실 수 있을까. 그래도 응우옌티탄님의 연이은 국가배상소송 승소가 다른 유가족 분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되어, 바뀌지 않는 현실을 기어코 바꿔내고야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지금의 현실이 비록 암담하더라도, 승소의 소중한 경험을 되새기며 초심을 되찾고자 한다. 베트남에 유학을 온 목적을 달성해 나 또한 현실을 바꿔보려 한다.


글: 궁정욱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