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읽기[평화의 mat] 마르세유의 연어들 / 음동건

2025-09-17
조회수 336


마르세유의 연어들


음동건 (프랑스 유학생/평화기행 참가자)


‘동양의 파리’라는 호찌민 시를 방문할 당시 노트르담 성당을 구경한다는 소식에 한껏 들떴음을 고백한다. 프랑스 유학생 티를 내느라 그런 것인가 싶으면서도 사실 파리가 아닌 남부 프로방스에서 지내왔으니 그저 오리엔탈리즘에 흠뻑 취한 시골쥐였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파리 노트르담에서의 감격을 기대했음은 부인하지 않겠다. 공사 중인 탓에 철제 구조물로 둘러싸인 사이공 노트르담의 모습에 다소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파리에 상경할 때면 어김없이 들러 한낮이든 해질녘이든 한참을 바라보던 노트르담, 그곳에서 센 강을 따라 5분 도보 거리의 생 미셸 다리(Pont Saint-Michel)는 시테 섬을 가로지르는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그럼에도 다리 한쪽에 설치된 조형물에 눈길을 주는 이는 많지 않은데 ‘낭만의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흉하지는 않다. 어리둥절할 뿐이다. 설명도 프랑스어만으로 적혀 있으니 대다수의 방문객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것도 탓할 일은 아니다.


야외, 하늘, 건물, 구름이(가) 표시된 사진

AI 생성 콘텐츠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1961년 10월 17일 알제리인 학살 추모비. 2025년 5월 26일 촬영) © 음동건 


‘1961년 10월 17일 학살’을 추모하는 이 조형물은 2019년 파리 시에서 세운 것이다. (이전에는 2001년에 설치된 동판이 있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알제리인이다. 그날 밤, 파리 한복판에서 일어난 시위는 수십 명의 사망과 수백 명의 체포로 이어졌고 이 사건은 1990년대가 되어서야 침묵에서 해방되었다. 1961년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세력과 전쟁 중이었다. 1999년까지 법적으로 ‘질서유지 작전’이라 부르기를 고집한 ‘알제리 전쟁(1954-1962)’은 프랑스의 자존심에만 상처를 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갈래의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132년의 식민지배를 지나 알제리가 독립을 이룬지 6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프랑스로부터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는 여태껏 없었다. 2022년 마크롱 대통령이 알제리 ‘순국열사기념관’에서 헌화하는 등 화해에 다가선 순간들은 있었지만, 자원외교가 주된 목적이었던(혹은 그렇게 의심받는) 전략적 행보가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은 최근 급격히 악화된 프랑스-알제리 관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더군다나 알제리를 비롯한 옛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사죄가 표를 얻는 데 유리하지 않아 보이는 오늘날의, 그리고 앞으로의 프랑스 정치 지형에서 감히 어떤 정부가 이를 다시 추진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흐르게 하고 바꾸어 놓는 이들이 반드시 상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바다에서부터 그 물살을 거슬러가는 연어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는데, 나는 작년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항구도시 마르세유에서 몇몇을 만났다. 바로 알제리계 프랑스인 청소년들, 흔히 이주민 2~3세대라 불리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다. 2024년 5월 8일, 파리 올림픽 성화가 마르세유를 통해 프랑스에 첫발을 내딛던 날이었다. 프랑스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인 이 날이 알제리인들에게는 1945년 같은 해 일어났던 ‘세티프 학살’의 비극으로 기억되는 추모일이다.


의류, 사람, 야외, 신발류이(가) 표시된 사진

AI 생성 콘텐츠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마르세유, 1945년 5월 8일 알제리 세티프 학살 추모식. 2024년 5월 8일 촬영) © 음동건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수천 명, 혹은 알제리 정부의 추산으로는 수만 명에 이르는 알제리인들이 1945년 5월 당시 나치 독일로부터 갓 해방된 프랑스에게 독립을 요구하다 죽임을 당했다. 내가 만난 알제리계 다음 세대 아이들, 이민자 가정이지만 분명히 프랑스인인 이 아이들이 그에 대한 진실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힘있는 자들이 손을 놓아버린 과거사 문제를 분명하게 마주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위로부터의’ 침묵을 거부하는 담대함을 보았다. 마침 함께 열린 가자 지구와의 연대 시위 구호가 또렷하다. "베트남처럼, 알제리처럼, 팔레스타인 또한 이겨내리라".

진실을 마주할 용기,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 과오에 대한 반성, 양심 혹은 희망,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이 싹트는 곳은 언제나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다. 다음 세대만큼 그 목소리에 울림을 실을 수 있는 이들도 드물다고 믿는다. 새로움과 변화의 상징은 늘 젊은이들이기에 그러하다. 올 여름, 평화기행을 통해 나는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하여 고개를 숙이면서도, 진실과 화해를 향한 다음 걸음을 함께 내딛을 한국과 베트남의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앞날을 그려보았다.

머지않아 베트남의 청년들이, 그리고 다문화 한국 사회의 베트남계 후손들이 물을 것이다. 알제리의 후손들, 마르세유의 연어들이 프랑스에 묻는 것처럼. 퐁니에서, 퐁녓에서, 빈호아에서, 하미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했느냐고. 하미 마을의 비문은 어째서 아직도 연꽃으로 덮여 있느냐고. 그날이 오면,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를, 직접 보고 듣고 만난 경험이 망각의 방패가 되기를, 그 시간들이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있기를, 연어 무리와 함께 물살을 거스를 수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평화의 mat]

'mắt'은 베트남어로 '눈(目)'을 뜻하는 단어로 '평화의 mat'은 평화의 눈으로 '맛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