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읽기[평화의 mat] 나는 왜 읽고 쓰는가 / 이용석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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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읽고 쓰는가


 이용석


서울 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정말이지 문전성시였는데 당연하게도(?) 책을 구경하고 읽고 사는 사람들은 젊은 여성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도서전에 참여한 출판사들의 부스에도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책들이 많았다. 독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평화활동가로서 나는 도서전에서 평화운동 관련 책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하긴 평화운동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책 자체가 전체 출간 책들 중에서 아주 극소수인 게 현실이니 도서전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겠지.

 

사람들은 내가 책을 많이 읽는 줄 아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물론 대한민국 평균보다는 많이 읽겠지만 다독가는 아니다. 다만 내가 읽은 책에 대해서는 가능한 뭐라도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정말 많이 읽는 사람들은 스무 권을 읽고도 다섯 권만 읽은 티를 내는 반면, 나는 열 권을 읽으면 그중 아홉 권은 티를 내는 셈이다. 워낙에 떠들기 좋아하는 성정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책 읽고 난 뒤 생각이나 느낌, 감상을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책 읽고 난 뒤에는 꼭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을까? 왜 좋아했을까? 돌이켜보면 천성이 수다쟁이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듣는 것, 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 좋아했다. 그래서 청소년 시절에는 학교 수업 시간에 소설책을 주로 읽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과목 시간에 소설책을 읽다가 들키면 수능 국어 공부한다고 둘러댔는데 그러면 매를 조금은 덜 맞았다. 대학에 가서는 세미나를 하느라 주로 사회과학, 인문학 도서를 읽게 되었지만 그때도 나는 문학을 좋아했다. 같이 학생운동을 하는 그룹에서 학번별로 세미나 팀을 꾸렸는데 다른 팀들은 정치경제학, 정치철학 이런 걸 공부할 때 우리 팀은 내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문학작품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대학 시절 책을 많이 읽진 않았다. 데모하느라 바빠서도 있겠지만 노느라 바빠서 그랬다는 게 좀 더 정직한 대답이다.

 

그러다가 졸업하고 나서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갔는데, 감옥은 정말이지 독서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물론 공간이 비좁아서 책을 쌓아둘 수 없고, 어두침침한 조명은 눈을 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마저도 밤 9시가 지나면 소등을 해버렸는데, 감옥은 감시를 위해 소등을 해도 불은 완전히 끄지는 않았다. 나는 눈 건강제를 먹어가면서 조금이라도 또렷하게 보려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고, 잠귀 밝은 방 사람들이 깰까봐 책장을 조심스레 넘겨가면서 책을 읽었다. 인터넷도 없고 친구도 없는 공간. 할 수 있는 놀이가 책 읽고 편지 읽고 편지 쓰는 것밖에 없던 시절. 온갖 종류의 텍스트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단행본부터 「한겨레21」이나 「시사인」, 「씨네21」 같은 주간지, 「녹색평론」 같은 계간지는 농담 조금 보태면 표지의 제목부터 뒤표지의 ISBN까지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읽었다. 내가 대단한 독서광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감옥에서 책을 읽고 대단한 통찰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 책들 덕분에 더디게 흐른 감옥의 시간을 잘 지나올 수 있었던 정도다.

 

글쓰기도 좋아했는데 그렇다고 책을 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필요한 책들을 내가 기획하고 작가를 찾아서 책이 나온다면, 나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평화운동 책을 쓴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작가를 찾지 못해서다. 실제로 출판사 다니면서 여러 차례 기획서를 쓰고 작가를 섭외하려 했으나 번번이 불발되었다. 어쩌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하는 심정으로 책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인데, 활동가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을 쓰는 일만큼 저절로 공부가 되는 일이 또 없다. 흔히들 책 한 권을 쓰려면 책 백 권을 읽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읽기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공부는 머릿속에 든 생각을 내 언어로 정리해서 남들에게 설명하거나 주장해 보는 것이다. 내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는 지식은 온전히 소화되지 않은 지식인데, 글쓰기는 일종의 소화촉진제처럼 내 언어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를 도와준다. 책을 쓰면서 나는 그전보다 더 똑똑해졌고, 더 성장했다고 느꼈다. 어떤 면에서는 글쓰기는 독자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한 행위였는지도.

 

그런 생각을 한 뒤부터 나는 평화활동가 동료들에게 글을 쓰고 책을 내라고 채근했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는 콘텐츠가 있고, 경험과 사유가 있는 활동가들이었는데 활동가 특유의 겸손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생각과 말을 공식적인 매체로 남기는 데 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더러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워낙 바쁜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역시 감옥에 가야 책 읽고 글 쓰기 좋은 건가.)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정리한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순전한 이기심’,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열정’,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달하고 싶은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 조지 오웰은 원래 자신은 앞의 세 가지 동기가 훨씬 강한 사람이었지만 시대적 상황 때문에 결국 ‘정치적 목적’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조지 오웰이 말한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들이 모두 활동가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공부하기 위해서’를 추가하고 싶다. 다른 직업 영역도 마찬가지겠지만 활동가들은 늘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문제를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해, 사람들과 만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방식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출현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읽고 쓰기 만큼 돈이 적게 드는 공부법도 없다.

 


이제부터 지금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인데, 사실 요즘의 나는 위의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주 사적인 이유로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한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똑똑해지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나에게 자리 잡은 독서와 글쓰기의 이유는 이것이 가장 가성비가 좋은 취미생활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모르는 사람들 만나는 일이 마냥 즐거웠는데, 이제 나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 아니라면 혼자 노는 것이 더 편하다. 게다가 활동가 월급이란 게 아주 보잘것없어서 노는 데 쓸 돈도 부족하다. 내가 무슨 흥청망청 쓰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그렇다. 이놈의 자본주의 세상은 노는 일에도 끊임없이 돈을 쓰게 하는데, 내가 조금의 욕망만 드러내도 내 지갑을 탈탈 털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책 읽기, 글쓰기는 서울 시내에 가지 않아도 되고, 나 혼자 즐길 수 있어서 에너지 과하게 써가며 사람들 안 만나도 되고, 굉장히 저렴하니 이만한 놀이가 또 어디 있겠나 싶다.

 

그래서 나는 공부하려고도 아니고, 정치적인 목적도 아니고, 그냥 놀려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활동가들도 사람인데, 잘 놀아야 활동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이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러면 굳이 책을 읽을 필욘 없다. 하지만 딱딱하고 고상한 목적을 다 내팽개치고 정말로 재미를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써본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나는 이제는 에너지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수다쟁이,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서평을 쓰든 수다를 떨든 이야기 나눌 사람은 늘 환영한다. 재미있는 책 읽고 싶다면 『평화는 처음이라』, 『병역거부의 질문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를 추천한다. (내가 쓴 책이라 추천하는 거 맞다)


글    | 이용석(전쟁없는세상 활동가.  타이거즈가 잘할 때는 야구를 보고, 타이거즈가 못할 때는 야구책을 본다.)

사진 | 이용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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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mat]

'mắt'은 베트남어로 '눈(目)'을 뜻하는 단어로 '평화의 mat'은 평화의 눈으로 '맛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