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읽기[평화의 mat] 또 다른 세계의 우리는 평화로울까요? / 전홍식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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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의 우리는 평화로울까요?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장

(게임 개발자, 강사, 사설 도서관을 운영 중입니다.)

 

안녕하세요. 전홍식입니다. 책을 좋아해서 개인 도서관까지 운영하게 된, 조금은 괴짜 같은 사람입니다. 단지 어릴 때부터 모은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어 20년을 향해 가고 있네요. 제가 운영하는 곳은 [SF&판타지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Science Fiction)와 판타지, 그중에서도 SF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죠.


SF는 과학적 상상을 바탕으로 한 허구입니다. 허무맹랑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엔 다양한 세계의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SF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SF, 이른바 공상과학(이 용어를 싫어하는 분도 많지만)이라면, 흔히 우주선이나 로봇을 떠올리며, 먼 미래 얘기라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SF에선 현실을 바탕으로 가까운 장래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1949년에 나온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말이죠.


‘우주선도 로봇도 안 나오는데 SF일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SF에서 중요한 건 과학적 상상력이며, 여기엔 ‘사회 과학’도 포함됩니다. 특정한 정치나 사회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합니다. 기계 장치로 사람들을 24시간 감시하며, 기억을 조작하고 정보를 통제하는 사회 체제는 어떤 것이며, 이런 세계에서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가?


‘디스토피아 SF’라고 불리는 이들 장르에서는 감시와 통제 사회가 얼마나 끔찍하며, 사람을 얼마나 망쳐버리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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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베평화재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전홍식 님(왼쪽) © 한베평화재단


SF 중엔 현재나 과거를 무대로 한 것도 있습니다.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어쩌면 이런 현재가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펼쳐낸 이야기. 이를 ‘대체 역사’라고 부릅니다. 대체 역사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역사가 펼쳐진 세계를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우연이건 아니건 과거에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세계 이야기입니다.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21세기에도 한반도가 일제에게 지배당하는 상황을 그려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실패하면서 역사가 달라졌는데, 그로 인해 변해버린(가령 이순신 장군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 서 있는) 서울, 아니 경성 풍경은 너무도 기묘하면서도 진짜 같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역사에 만약(IF)’이라는 것을 더하여 만든 대체 역사는 역사에 관한 관심과 함께 현재의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특히 [2009 로스트 메모리즈]처럼 지금보다 끔찍한 상황을 보며, 이렇게 안 되어서 다행이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역사 속엔 베를린 위기나 쿠바 위기 같은 상황이 몇 번이나 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지도자들이 현명하게 대처했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인류 멸망이나 그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졌을지도 모릅니다. 신약성경 속 묵시록(아포칼립스)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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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2002) 포스터


이런 대재앙 후에도 누군가는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매드맥스] 같은 영화를 보면 그 삶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묵시록 이후)라 부르는데, 대개 지옥 같은 세계에서도 인간성과 희망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옥 같은 환경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현실의 전쟁처럼, 인류 문명을 거의 붕괴시킨 재앙의 상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재앙에 대한 두려움과 경각심을 갖게 되죠.


SF에는 과학 기술이 인류를 구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SF가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디스토피아의 절망적인 사회나, 대체 역사 속 끔찍한 상황,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지옥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세계는 최악이야.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기에 이야기로서 편하게 볼 수 있지만, 보면 볼수록 그럴듯한 느낌에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우려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며, 교훈을 준다’라고 합니다. 정확히는 ‘교훈을 통해 미래로 이끈다’라고 볼 수 있겠지요.


1983년에 나온 영화 [그날 이후(The Day After)]는 이처럼 인류에게 교훈을 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이 영화는 핵전쟁 후 변화하는 세상 모습을 보여줍니다. 핵폭발 와중에도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지만,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물도, 논밭도 오염되어 살길이 막막한 가운데, 조금씩 죽어가는 사람들...


자그마치 1억 명이 TV를 통해 이 영화를 보았고, 겁에 질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이가 끔찍하게 죽어가는 그 모습은 ‘승리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던 어떤 전쟁보다 끔찍했습니다.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강경책에 나서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 많다’라며 소련과 평화적인 협상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1987년엔 미국의 제안으로 소련에서도 이 영화가 방송되었는데, 바로 그해 미국과 소련 간에 처음으로 의미 있는 핵감축 협상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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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날 이후(The Day After)」 (1983) 포스터


지난해 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저는 아내와 함께 임진각에 놀러 갔습니다. ‘평화 곤돌라’를 타고 방문한 ‘비무장 지대’에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발견했습니다. 반짝이는 장식 뒤편으로 하트 모양 의자가 있지만, 그 너머로 ‘지뢰 주의’ 팻말이 눈길을 끌었죠. 그 순간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단지 ‘잠시 전쟁을 쉬는 중(휴전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세계의 저는 이미 죽었을지도,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가령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지도부가 핵폭탄 사용을 고려했다는데, 그게 실현되었다면, 역사상 최초의 핵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소련에도 핵폭탄이 있었으니까요. 그로 인한 대체 역사는 분명히 재미있는 SF겠지만,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겠죠.


2025년의 지금, 대한민국은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가 행복하게 살아가죠. 하지만, SF를 보면, 여러 디스토피아, 대체역사,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면, 그 평화가 너무도 취약해 보입니다. 엄청난 행운과 수많은 이의 노력으로 겨우 지켜지고 있음을 떠올리게 되죠.


누군가 말했습니다. “재난은 상상력이 부족해서 일어난다.” 저는 전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결과를 조금만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일이 내게 일어날 때 얼마나 끔찍할지를 상상할 수 있다면, 전쟁은 쉽게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이를 옹호하는 일은 줄어들겠죠.


저는 꿈꿉니다. 더 많은 이가 미래를 상상하는 세상을, 그래서 미래가 아주 조금은 더 좋아질 수 있는 대체 역사를,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닌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가능성을.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세상을 상상하는 힘이 필요하죠. 제가 SF를 좋아하고 권하는 것은, SF가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하여, 더 나은 미래, 더 평화롭고 희망적인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비춰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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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속 크리스마스 트리는 제게 더 없이 SF적으로 보였습니다." © 전홍식



[평화의 mat]

'mắt'은 베트남어로 '눈(目)'을 뜻하는 단어로 '평화의 mat'은 평화의 눈으로 '맛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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