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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평화기행 후기] 야유나무는 모두 보았지 / 김대선

야유나무는 모두 보았지

- 평화기행 후기 -


김대선(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 교사)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경태의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퐁니·퐁넛 마을 사건을 발굴하고 세상에 끄집어낸 고경태 기자의 이 책 첫머리는 고경태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응우옌티탄을 마중 나갈 때의 아찔하면서도 재미있는 실수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재미있지 않았다. 책을 관통하고 있는 끔직함과 내 뇌리에 박힌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응우옌티탄 아주머니가 웃옷을 올려 배부터 옆구리까지 길고도 깊은 흉터를 보여주며 이쪽을 응시하는 모습이었다. 담담해 보이지만 슬펐다. 속살을 보여주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진실을 알리고 싶은 절실함과 강건함이 느껴졌다.

상처를 보여주고 있는 응우옌티탄 / <한마을 이야기, 퐁니포넛> 고경태 저


그 후 탄 아주머니는 내게 베트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고 퐁니·퐁넛 마을은 전쟁의 아픔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런 곳을 이번 평화기행에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오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 번 취소되고 태풍 때문에 한 번 더 취소될 뻔 했다. 드디어 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다. 너무 아픈 상처는 보기만 해도 아프기에 퐁니·퐁넛은 오히려 눈 똑바로 뜨고 보고 싶지는 않은 곳이 되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것 같다.


태풍이 지나간 뒤 방문한 퐁니 위령비


퐁니·퐁넛 마을 가는 길은 날씬한 야자수가 있다는 것만 빼고는 어릴 적 찾아가던 할머니댁이 있던 마을과 놀랍게 비슷한 풍경이었다. 평화롭고 한가롭고 별다를 것 없는 그냥 사람 사는 마을이었다. 이곳이 어느 날 갑자기 지옥이 된 것이다. 위령비를 참배하려는데 마을의 어느 노인이 지나가다 들른 것 같다. 인적이 뜸한 곳에 사람들이 오랜만에 버글거리니 궁금해서 와 본 모양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 이분이 바로 응우옌티탄 아주머니의 삼촌이라고 했다. 

당시 남베트남 군인이었던 할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서 희생자들을 수습하셨다고 한다. 남베트남군이면 당시 한국군의 동맹군이었는데 동맹군의 손에 가족이 무참히 죽어간 것이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날씨에 너무도 한가로워 보이는 마을 어른의 입에서 무심히 나오는 말은 너무도 비참했다.


퐁니 위령비 옆에서 바라보이는 야유나무


위령비가 있는 곳 옆에는 야유나무가 서 있었다. 이 야유나무는 1968년 2월 12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보고 있었다. 퐁니·퐁넛 마을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그리우면 지금도 야유나무로 온다고 한다. 바람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면 죽은 사람들이 돌아와 부르는 소리로 여겼다고 한다. 

와보길 잘했다. 이 땅을 밟고 이 공기를 맡으니 이곳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로 사진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그냥 그날의 일이 통으로 내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상상할 수 있었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이 슬픔을 이 잘못을 어떻게 씻을 것인가. 

돌아보니 우리 아이들이 야유나무 아래에 나란히 서서 기도하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저 아이들이 있어서 다행이구나. 우리 윗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저 아이들은 적어도 알지 않았는가. 아이들이 알게 되고 또 누군가 이어서 알게 되면 어쩌면 깊고 깊은 상처의 골이 메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기도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경험상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동시에 머리를 스쳤을 테고, 기도 후의 여운도 기도에 포함될 테니.


야유나무의 제단에 향불을 바치고 있는 한국국제학교 학생들


드디어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를 만나러 댁을 방문했다. 만나는 것 자체가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지만 뜻대로 한국정부의 사과를 받는 것은 실패한 터라 실망이 큰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정말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최근엔 코로나 때문에 한국인의 방문이 거의 없어서 한국인의 방문이 반갑다고도 하셨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퐁니 마을의 자택을 방문하여 탄 아주머니의 증언을 들은 시간
탄 아주머니의 뒤쪽 오른편에, 사건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삼촌 응우옌득쩌이


탄 아주머니는 처음엔 한국인을, 특히 한국 남자를 두려워했다. 아주머니가 8살이었을 때, 한국군에게 가족들이 몰살을 당하고 당신도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튀어나왔다고 했다. 집 땅굴 위에서 수류탄을 들고 노려보던 한국군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고 그 뒤로 한국 남자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서웠다고 했다. 사진의 한 장면처럼 뚜렷한 각인. 그 장면은 평온한 삶을 위해서는 없어져야할 기억이었다. 그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 내셨다. 어렵게 방문한 방문객들을 위해 당신 살을 베어 내어주시는 것 같았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인생을 얼마나 많이 헤집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탄 아주머니의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아도 비극이고 멀리서 보아도 비극이었다. 1968년 2월 12일 하루의 비극은 찰나였지만, 그 후 그것을 감내하는 시간들은 처절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려운 시간들이 흐르고 우리들 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넬 때, 스스럼없이 한 명 한 명을 안아주셨다. 여행을 안내해준 권현우 샘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아주머니가 먼저 안아주는 일은 그동안은 잘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극단의 고통 속에서 해답을 스스로 찾은 것일까? 아직 모든 상처가 메워지진 않았다.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단호히 대답하였다. “한국 정부의 사과를 받는 것입니다.”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탄 아주머니의 상처가 치유되는 날 우리들의 뻥 뚫린 마음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 2020년 10월 18일, 한베평화재단은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의 <베사문(베트남 사회와 문화 연구회)> 팀의 베트남 평화기행 일정의 안내자 및 해설사로 일정을 함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