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서 우리가 되기까지
김민지(평화기행 참가자)
‘활동가’를 업으로 삼은지 어언 5년. 그간 ‘아, 이 일 하길 정말 잘했다’ 싶을 정도로 보람찬 순간도 있었고, 또 때로는 내가 과연 활동가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투쟁이 가끔의 이벤트가 아닌 업무의 일부가 되자 “연대”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내뱉게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크고 작은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활동가의 일상에서 연대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커다란 에너지로 다가오다가도 때로는 참으로 허황된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주어진 한 달의 안식휴가. 마냥 퍼질러 쉬기 보다는 자기점검과 재인식의 시간으로 쓰고 싶었다. 완전히 새로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나를 던져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평화기행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시골 풍경
평화기행 동안 학살 피해가 있었던 여러 마을을 방문했고 위령비를 찾아 참배를 했다. 향을 피우고, 국화를 놓아두고, 짧은 묵념을 하고, 위령비에 적힌 피해자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기행단원으로서 내가 한 일은 재단 활동가들의 인솔에 따라 짧은 위로를 건네는 것이 다 이건만 내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아주 기꺼운 무게였다.

퐁니퐁녓 위령비 가는 길 © 김민지
퐁니·퐁넛 마을의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퐁니·퐁넛 마을의 위령비는 논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곧게 난 논두렁을 따라 걷다보면 커다란 나무 사이로 위령비가 보인다. 위령비까지 가는 길은 무언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었다. 길 가장자리에 늘어진 야자수만 아니었다면 여기가 한국 어느 시골 동네인가 싶었다. 전봇대와 늘어진 전선,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의 풍경이었다. 가장 큰 소음이 오토바이 소리와 집집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인 마을. 매 명절마다 찾아간 충남 논산의 할머니댁에 있는 것 같았다. 기후도, 지리도 완전히 다른 베트남에서 익숙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머나먼 타국으로만 생각되었던 베트남이 조금은 가까이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정겨운 순간도 있었다. 하미마을 위령비에 참배를 드린 후 하꽝마을까지 도보 순례 중에 있었던 일이다. 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기행단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고 밭에선 마을 주민분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줄지어 가는 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한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 베트남어로 뭐라 소리치며 무릎께를 손으로 가리켰다. 베트남어에 무지한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그저 앞 사람을 따라 걸어갔다. 뒤따라 오던 아침 님이 물을 뜻하는 베트남어 단어를 딱 알아듣고는 돌아가야 한다고 전해주었다. 아주머니는 비가 오는 바람에 길이 물에 잠겨 그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그분의 친절 덕에 모두가 신발을 적시지 않고 안전히 하꽝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존자는 닮아있다
기행의 마지막 날,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이자 국가배상소송의 원고이신 응우옌티탄 님과의 좌담회 시간을 가졌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서 베트남과 한국을 넘나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탄 님의 목소리에 큰 울림을 받았다. 한 기행단원 분이 탄 님에게 승소 이후에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를 질문했었다. 질문을 건네 들은 탄 님은 양 손에 마이크를 쥐고 한참을 말을 고르셨다. 직전까지 어떤 주제에도 머뭇거림 없이 명료한 대답을 내놓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렇게 고민 끝에 꺼낸 답변은 다른 학살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는 말이었다.
간담회에서의 응우옌티탄 님 © 아침
탄 님의 진심어린 한 마디에 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로 일하면서 내가 만났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떠올랐다. 피해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왜 경찰 신고를 하게 되었는지를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신고까지 이르게 되는 경위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많은 피해자들이 언급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기지 않았으면 해서”다.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타인의 피해를 막고자, 가해자의 가해를 멈추고자 피해자들은 기꺼이 움직인다.
폭력 피해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공통점이 많다. 그 폭력의 종류와 양상은 각기 다를지언정 피해 이후 그들이 겪는 투쟁은 참으로 닮아 있다. 피해자가 피해를 공적으로 발설했을 때 받는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가 그렇다. 거대한 권력 앞에 대항하여 외롭고 지난한 싸움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기꺼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 피해자들의 용기와 정의에 항상 깊은 감동을 느낀다. 그들의 발걸음에 기꺼이 함께하기를 다짐하게 된다.
다시 찾은 연대의 힘
사람들이 역사의 교훈을 존중한다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야 해.
손에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책을 들고 옛날 이야기를 서로 나눠야지.
자신들의 나라와 민족에 대해 상대에게 알려주어야 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양해도 구할 수 있고, 도움도 줄 수 있는 거지. 심지어 서로 사랑도 할 수 있을 거야.[1]
평화는 서로 마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마주봄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지하고 눈을 마주치고 동등한 눈높이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부딪혀야 한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그저 오랜 과거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와 동떨어진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같은 지구땅을 밟고 나의 곁에 함께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나’와 ‘그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 연대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될테다.

투본강 응우옌티탄의 승소를 바라는 사람들 깃발을 든 글쓴이 © 아침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니 영하의 기온과 칼바람이 나를 반긴다. 오늘은 하루종일 눈발이 날리는 날이다. 창 밖으로 온통 하얀 눈이 가득하다. 눈 결정 하나하나는 너무도 조그맣다. 손에 올려 놓으면 체온에 금새 녹아 물이 되어버린다. 각각의 개별은 쉽게 형체를 잃고 스러진다. 반면 한 데 모인 눈은 단단한 형체와 무게를 가진다. 눈 결정이 하나둘 모이고 모여, 쌓이고 쌓여 덩어리가 되면 몇 십 년된 나무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다 못내 부러진다. 동료시민의 힘은 눈과 같은 거라 믿는다.
나무도 부러뜨릴만한 묵직한 눈덩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눈이 내리기만 해선 안된다. 여러 기후적 환경적 조건들이 필요하다. 작년 11월에 내렸던 이례적인 폭설은 영하 40도의 절리저기압과 기후변화로 인해 해수면 온도가 상승한 서해 바다가 만나 생겼다. 찬 바람과 더운 바다가 더 많은 수증기를 만들었고 물기를 많이 머금은 습설(濕雪)이 내렸다. 습설은 잘 뭉쳐지고 적은 양도 엄청난 무게를 동반한다.[2] 무거운 눈이 쌓이고 쌓여 나무를 쓰러뜨리고 구조물을 부술만한 힘을 가지게 된다.
시민사회에 습설이 쌓일 수 있는 조건들을 차근차근 밟아두는 것이 활동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 위에 시민들의 눈이 켜켜이 쌓여 고목처럼 견고해보였던 권력 구조를 부러뜨리고 새로운 사회 정의를 지을 수 있으리라. 끊임없이 내리는 눈이 되어본다. 그리고 봄이 되어 눈이 녹아 물이 되면 어린 나무와 새싹과 새 생명이 자라날 영양분으로 십분 쓰이리라. 그렇게 연대가 순환되길 바란다.
[1] 반레,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 『그럴 수도 아닐 수도』에서 재인용
[2] “11월 이례적 폭설에 무겁기까지‥이유는?”, <MBC뉴스>
타자에서 우리가 되기까지
김민지(평화기행 참가자)
‘활동가’를 업으로 삼은지 어언 5년. 그간 ‘아, 이 일 하길 정말 잘했다’ 싶을 정도로 보람찬 순간도 있었고, 또 때로는 내가 과연 활동가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투쟁이 가끔의 이벤트가 아닌 업무의 일부가 되자 “연대”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내뱉게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크고 작은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활동가의 일상에서 연대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커다란 에너지로 다가오다가도 때로는 참으로 허황된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주어진 한 달의 안식휴가. 마냥 퍼질러 쉬기 보다는 자기점검과 재인식의 시간으로 쓰고 싶었다. 완전히 새로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나를 던져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평화기행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시골 풍경
평화기행 동안 학살 피해가 있었던 여러 마을을 방문했고 위령비를 찾아 참배를 했다. 향을 피우고, 국화를 놓아두고, 짧은 묵념을 하고, 위령비에 적힌 피해자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기행단원으로서 내가 한 일은 재단 활동가들의 인솔에 따라 짧은 위로를 건네는 것이 다 이건만 내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아주 기꺼운 무게였다.
퐁니퐁녓 위령비 가는 길 © 김민지
퐁니·퐁넛 마을의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퐁니·퐁넛 마을의 위령비는 논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곧게 난 논두렁을 따라 걷다보면 커다란 나무 사이로 위령비가 보인다. 위령비까지 가는 길은 무언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었다. 길 가장자리에 늘어진 야자수만 아니었다면 여기가 한국 어느 시골 동네인가 싶었다. 전봇대와 늘어진 전선,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의 풍경이었다. 가장 큰 소음이 오토바이 소리와 집집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인 마을. 매 명절마다 찾아간 충남 논산의 할머니댁에 있는 것 같았다. 기후도, 지리도 완전히 다른 베트남에서 익숙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머나먼 타국으로만 생각되었던 베트남이 조금은 가까이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정겨운 순간도 있었다. 하미마을 위령비에 참배를 드린 후 하꽝마을까지 도보 순례 중에 있었던 일이다. 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기행단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고 밭에선 마을 주민분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줄지어 가는 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한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 베트남어로 뭐라 소리치며 무릎께를 손으로 가리켰다. 베트남어에 무지한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그저 앞 사람을 따라 걸어갔다. 뒤따라 오던 아침 님이 물을 뜻하는 베트남어 단어를 딱 알아듣고는 돌아가야 한다고 전해주었다. 아주머니는 비가 오는 바람에 길이 물에 잠겨 그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그분의 친절 덕에 모두가 신발을 적시지 않고 안전히 하꽝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존자는 닮아있다
기행의 마지막 날,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이자 국가배상소송의 원고이신 응우옌티탄 님과의 좌담회 시간을 가졌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서 베트남과 한국을 넘나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탄 님의 목소리에 큰 울림을 받았다. 한 기행단원 분이 탄 님에게 승소 이후에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를 질문했었다. 질문을 건네 들은 탄 님은 양 손에 마이크를 쥐고 한참을 말을 고르셨다. 직전까지 어떤 주제에도 머뭇거림 없이 명료한 대답을 내놓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렇게 고민 끝에 꺼낸 답변은 다른 학살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는 말이었다.
간담회에서의 응우옌티탄 님 © 아침
탄 님의 진심어린 한 마디에 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로 일하면서 내가 만났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떠올랐다. 피해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왜 경찰 신고를 하게 되었는지를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신고까지 이르게 되는 경위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많은 피해자들이 언급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기지 않았으면 해서”다.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타인의 피해를 막고자, 가해자의 가해를 멈추고자 피해자들은 기꺼이 움직인다.
폭력 피해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공통점이 많다. 그 폭력의 종류와 양상은 각기 다를지언정 피해 이후 그들이 겪는 투쟁은 참으로 닮아 있다. 피해자가 피해를 공적으로 발설했을 때 받는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가 그렇다. 거대한 권력 앞에 대항하여 외롭고 지난한 싸움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기꺼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 피해자들의 용기와 정의에 항상 깊은 감동을 느낀다. 그들의 발걸음에 기꺼이 함께하기를 다짐하게 된다.
다시 찾은 연대의 힘
사람들이 역사의 교훈을 존중한다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야 해.
손에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책을 들고 옛날 이야기를 서로 나눠야지.
자신들의 나라와 민족에 대해 상대에게 알려주어야 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양해도 구할 수 있고, 도움도 줄 수 있는 거지. 심지어 서로 사랑도 할 수 있을 거야.[1]
평화는 서로 마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마주봄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지하고 눈을 마주치고 동등한 눈높이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부딪혀야 한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그저 오랜 과거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와 동떨어진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같은 지구땅을 밟고 나의 곁에 함께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나’와 ‘그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 연대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될테다.
투본강 응우옌티탄의 승소를 바라는 사람들 깃발을 든 글쓴이 © 아침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니 영하의 기온과 칼바람이 나를 반긴다. 오늘은 하루종일 눈발이 날리는 날이다. 창 밖으로 온통 하얀 눈이 가득하다. 눈 결정 하나하나는 너무도 조그맣다. 손에 올려 놓으면 체온에 금새 녹아 물이 되어버린다. 각각의 개별은 쉽게 형체를 잃고 스러진다. 반면 한 데 모인 눈은 단단한 형체와 무게를 가진다. 눈 결정이 하나둘 모이고 모여, 쌓이고 쌓여 덩어리가 되면 몇 십 년된 나무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다 못내 부러진다. 동료시민의 힘은 눈과 같은 거라 믿는다.
나무도 부러뜨릴만한 묵직한 눈덩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눈이 내리기만 해선 안된다. 여러 기후적 환경적 조건들이 필요하다. 작년 11월에 내렸던 이례적인 폭설은 영하 40도의 절리저기압과 기후변화로 인해 해수면 온도가 상승한 서해 바다가 만나 생겼다. 찬 바람과 더운 바다가 더 많은 수증기를 만들었고 물기를 많이 머금은 습설(濕雪)이 내렸다. 습설은 잘 뭉쳐지고 적은 양도 엄청난 무게를 동반한다.[2] 무거운 눈이 쌓이고 쌓여 나무를 쓰러뜨리고 구조물을 부술만한 힘을 가지게 된다.
시민사회에 습설이 쌓일 수 있는 조건들을 차근차근 밟아두는 것이 활동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 위에 시민들의 눈이 켜켜이 쌓여 고목처럼 견고해보였던 권력 구조를 부러뜨리고 새로운 사회 정의를 지을 수 있으리라. 끊임없이 내리는 눈이 되어본다. 그리고 봄이 되어 눈이 녹아 물이 되면 어린 나무와 새싹과 새 생명이 자라날 영양분으로 십분 쓰이리라. 그렇게 연대가 순환되길 바란다.
[1] 반레,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 『그럴 수도 아닐 수도』에서 재인용
[2] “11월 이례적 폭설에 무겁기까지‥이유는?”, <MBC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