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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평화기행 후기] 그들의 세대가 진실을 나눌 수 있기를 / 이오은

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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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세대가 진실을 나눌 수 있기를


이오은(평화기행 참가자)


당티카님의 집은 호이안의 탄하 도자기 마을과 가깝다. 택시는 오래 걸리지 않아 그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는 집 바로 근처에서 베트남 식 샌드위치인 반미를 만들어 판다. 건강이 괜찮으면 밭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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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처음 만났지만 그의 이름은 2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한 책 (고경태, 베트남 전쟁 1968년 2월 12일, 2021)에서 읽었다. 그 책에서는 그가 너무 서럽고 아프게 울었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기자로 일한 저자가 의아할 정도의 슬픔이었다. 그 날은 1968년 어느 하루, 오전 한나절동안 135명의 사람이 죽었던 날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질 기공식이 있었던 날이었다. 사진으로 보았던 그는 꽃무늬 옷을 입고 고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한베평화재단이 주관한 2026년 1월 평화기행의 안내 책자에는 그가 2023년 위령제 때 늦게 왔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음력 1월 24일. 그날은 추모제 날이다. 추모제는 매년 돌아온다. 그가 가족을 잃은 날. 너무 슬퍼하면 쓰러질 것 같은 걱정이 들어 일부러 늦게 왔다고 했다. 우리가 가는 것이 상처가 되지 않을까 새삼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당티카님은 우리 일행을 따뜻한 차와 함께 미소로 맞이해주셨다.

처음 만난 당티카님의 환한 얼굴만으로는 그가 지녔던 아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밝아보였다. 그는 올해 64세이다. 집에는 그의 손자와 남편분이 같이 계셨다. 나는 주섬주섬 갖고 간 카메라를 꺼냈다. 특별히 무엇을 촬영하려고 가져간 것이 아니라, 그저 기록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가져간 카메라였다. 의젓하지만 약간 쭈뼛쭈뼛하던 당티카 님의 손자가 카메라를 보는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이었을까, 그래도 한번 권해보았다. 혹시 관심있으면 네가 찍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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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쥐어준 카메라를 당티카님의 손자는 우리의 만남 내내 놓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황안이다.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나누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찍는 것이 그의 손자분이라는 것이 엉뚱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우리는 그의 가족을 앗아간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서 왔는데도.

그의 집 거실 벽에는 손자가 아기였을 적 작은 피아노 앞에 의젓하게 앉아있는 사진이, 다른 벽에는 손자가 졸업모자를 쓰고있는 유치원 졸업사진일 법한 사진이 있었다. 표창장도 여럿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보는 당티카님의 얼굴은 따뜻했다. 황안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나의 아이는 그와 같은 나이다.

우리는 수줍게 자기 소개를 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때로는 가벼웠고 때로는 무거웠다. 가끔은 동네 목욕탕에서 나눌법한 이야기가 오갔다. 자식분들은 어디 사시냐, 손주는 말을 잘 듣는가. 건강은 어떠신가.

그는 세살에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는 하미 마을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 어머니, 언니 두 명과 동생 두 명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다. 할머니가 세살이었던 그를 안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그 역시 죽었을 것이다. 일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그는 전쟁 고아로 지내며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는 글도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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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편분과 아들 내외와 손자와 같이 산다. 딸네 부부는 사돈과 같이 산다. 나이가 많아지며 조금만 움직여도 많이 아프시다고 했다. 눈도 잘 안보이고, 가끔은 전쟁 때 다친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몇달 전 홍수 피해가 많이 왔지만 고지대에 속하는 편이라 그나마 조금 피해가 적었다고 했다. 그래도 물이 집 앞마당을 넘어 들어왔다고 했다. 근처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 그래서 따이한 삼거리라고 불리던 지역은 지대가 낮아서 목까지 잠길 정도로 물이 찼다고 했다. 홍수가 지나가 물이 빠지면 청소를 해야 장사를 할 수 있다. 그 피해로 그럭저럭 한달 동안 반미를 팔지 못했다. 홍수도 홍수지만 태풍 걱정이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진천님은 당티카님 손주가 커서 결혼하는 것도 봐야 하니 꼭 건강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영옥님은 이분을 두번째 방문하는데, 건강 걱정도 되고 홍수 피해도 너무 걱정되신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베트남에서도 새해를 보내며 세뱃돈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다보니 종익님은 아이에게 용돈을 주셨다. 하노이에서 공부하는 정욱님은 치아 건강이 어떠신지도 여쭈어보았다. 그는 베트남어를 할 수 있다보니 활동가인 바오님과 함께 통역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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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 속에 갖고 있던, 하지만 쉽지 않았던 질문을 했다. 한국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힘들지는 않으세요? 당티카님은 한국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느낌은 남아 있지만 이제는 반가운 기분이 들 때도 있다고 대답해주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쟁 고아였기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부를 전해주면 너무 반갑고 기쁘다고 했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학살이 있었을 때 언니와 동생의 시체는 찾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무덤도 만들 수 없었다고.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만 남아있다. 그 무덤은 아주 작다. 그는 그 무덤을 다시 보수하고 싶다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무덤은 사람이 사는 집만큼 중요하다. 무덤이 클 수록 좋은 것이고, 도리를 다 한 것이다. 죽은 이들에게 무덤이 없다면 그들에게는 기억될 수 있고 살 수 있는 집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하미 마을의 학살을 부정한다. 그들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미에는 퐁니 마을의 학살과 같은 사진 자료는 없으나 생존자들은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고 베트남 정부 역시 하미 마을 위령비를 역사 유적으로 인정했다. 국방부는 당시 하미 마을 주민이 양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드라도 단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고 써 있는 채명신 장군의 훈령이다. 그 훈령은 2026년 지금도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놓여있다. 3살이었던 당티카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의 눈에 양민이 아니었던 것일까 ? 제네바협약의 원칙은 “어떤 사람이 민간인인지 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 민간인으로 간주한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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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년 동안 나는 전쟁과 학살을 다룬 책을 읽었다. 자료를 보았다. 글을 썼다. 학살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몇몇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내 눈으로 추모비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살을 겪은 이를 만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만난다는게 이 분에게 오히려 실례인건 아닐까?
일단 가자, 가서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당티카님을 찍은 황안의 사진을 본다. 그의 손자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도 그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당티카님이 보살펴 살아낸 그분의 삶과, 그의 자식과, 그의 손자를 만났다.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알 수 없어도, 그의 손자가 당티카 님과 우리를 이어준 것 같았다.

당티카님의 이야기가 단지 오열과 슬픔으로써가 아니라, 단단하게 살아낸 그의 삶과 함께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아이와 그의 아이가 언젠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같은 나이다. 그들의 세대가 진실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가능하다면, 우리를 맞아준 것 같은 환대의 장소에서, 진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어나가면서.


사진 | 이오은, 오종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