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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평화기행 후기] 끝까지 함께 갑시다 / 신재욱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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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함께 갑시다

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평화기행 내내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게 친지와 터전을 잃고 살아남은 당사자들을 만났다. 학살이 있었던 마을이면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위령비에서 참배를 했다. 모든 만남이 소중했다. 그 중 몇몇 장면을 나누려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 부모와 형제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이번 기행의 이끔이셨던 한베평화재단 짜노 님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미군과 한국군 모두 중부에서 주로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빈호아(평화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을 겪었다. 빈호아 증오비 비문의 첫 문장이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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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호아 증오비


빈호아 증오비와 위령비에 참배를 하고 빈호아 마을의 다른 작은 마을인 족릉마을로 향해 다시 마을 위령비에 참배했다. 기행단은 방문하는 모든 장소의 위령비마다 참배를 했다. 부끄럽게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많이 할 일인가 생각했다. 족릉마을 위령비 앞에서 1966년 12월 학살 당시 2살로 가족을 모두 잃고 살아남은 응우옌티방 님을 만났다. 당시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약간 어색한 듯한 방 님의 표정, 분향한 화로에서 나오는 연기 같은 것들을 다 뒤섞인 채로 감각했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상태에서 짜노 님의 말을 들었다. 앞서 짜노 님이 방 님과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한국사회가 어떻게 해 드리면 좋을까요?” 묻자, 방 님은 “내가 바라는 것은 내 할머니, 부모, 형제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라고 답했다 한다. 칠레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이들과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에 대해 다룬 『보이저』(가망서사, 2025)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물을 것이다. 왜 유골이 필요하죠? 나는 그의 유골을 사랑하니까요, 비올레타는 말한다.”(84쪽) 비올레타는 1973년 칠레 쿠데타로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편 마리오를 잃었다. 수십 년 동안 마리오의 유골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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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호아학살 중 하나인 족릉학살 위령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자의 삶은 죽은 자들과 떼어놓을 수 없구나, 가슴이 답답해졌다. 남은 자는 말 그대로 죽은 자들과 함께 현실을 살아간다. 방 님은 말씀을 많이 하진 않으셨다. 아직도 학살 당시 입은 몸의 상처 때문에 아프다고 하셨고, 당시를 상기시키는 이런 만남이 여전히 조금 힘들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미소를 지으며 방문단에게 고맙다는 말을 나눠주셨다. 


죽은 이들도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여전히 마을 주민으로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생존자를 방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위령비에 참배를 하며 돌아간 이의 안부를 묻고 평안을 비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는 같은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으로서 그 소망을 나눠 갖고 간직하는 것은 최소한의 책무일 것이다.  


“끝까지 함께 갑시다”


기행 첫날밤, 도안 홍 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평화로 가는 길〉을 함께 관람했다 퐁니마을 학살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 님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연대 활동을 통해 고통이 점점 사그라들었다는 내용의 말이었다. 이틀 후 실제로 탄 님을 댁에서 만났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정예은 님이 탄 님께 물었다. ‘계속 당시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힘들지 않으시냐’고. 탄 님은 처음에는 한국 사람, 특히 한국 남자를 대면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또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거듭 해야하는 게 괴롭고 슬펐다 하셨다. 그럼에도 계속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쌓아온 추억과 기억이 점점 힘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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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 마을 응우옌티탄


순간 깨달았다. 이번 기행에서 마주한 것은 그저 당사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옆에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대의 의미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학살 피해 유해발굴 현장에서 땅을 파기 전에 함께 외치는 말이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유해를 꺼내 망자를 위로하고 유족의 한을 풀어준다는 의미이자 억압된 기억을 다시 밝은 곳으로 꺼낸다는 의미다. ‘밝은 곳으로 모신다’는 말과 연대가 닮아 있다고 느꼈다. 증언은 화자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증언은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고 연대의 자리는 확장된다.


베트남전쟁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체 소속 활동가로서 시민평화법정부터 베트남전쟁 문제 관련한 몇몇 기자회견, 강연 등에 참여해왔지만 사실 가해국의 일원으로 지녀야 할 책임성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당위로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며 듣는 사람은 자신을 응시한다.”(『기억과 인식』, 어문학사, 2020, 164쪽) 탄 님의 마지막 발언은 “끝까지 함께 갑시다”였다. 베트남어로 먼저 발언을 들은 짜노 님이 다시 그 말을 한국어로 하셨다. 당사자와 연대자가 함께 건넨 ‘끝까지’라는 말 앞에서 나를 돌아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연대는 당사자들 역시 변화시켰다. 퐁니 탄 님을 만난 후 아담한 카페에서 하미마을 탄 님도 만났다. 하미마을 탄 님이 ‘베트남전 진실규명 특별법’ 발의 국회 기자회견에 보낸 편지에도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그래도 계속해야 한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 오랜 침묵의 시간을 지나 오롯하게 자신의 마음과 소망을 말하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싸우는 피해자’의 존재감을 느꼈다. 현재 투쟁의 중심에 서 계시는 두 탄 님이 지닌 결연한 마음은 연대자와 함께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걸 테다. 구수정 선생님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속해 온 연대의 두터움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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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 마을 응우옌티탄 (사진: 정인성 교무)


“너희가 가면 너무 슬플 것이다”

기행의 마지막 일정은 참가자들끼리 조를 나눠 몇몇 당사자 분들의 집으로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내가 속한 조는 응우옌떤럽 님의 집을 방문했다. 학살 당시 다른 지역에 있어 학살을 피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을 제외하고 다른 가족은 모두 돌아가셨다. 이후 밭일을 하다가 불발탄에 눈을 다쳐 양쪽 시력을 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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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 마을 응우옌럽


럽 님과 아내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학살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가족들의 안부, 평소에 어떤 어려움을 겪고 계신지 물었다. 가족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 잘 만나지 못하고, 두 분 다 몸이 좋지 않아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얼마 전에 수해로 물이 집안까지 다 들어찼다고 하셨는데, 집이 정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같이 방문한 분이 아내 분께 ‘지금까지 정말 힘드셨겠네요’ 묻자, 슬픔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럽 님은 거듭 ‘너희가 가면 너무 슬플 것이다’라고 되뇌셨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대문을 나선 이후에도 손을 흔들며 얼굴을 마주했다.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우리가 럽 님의 집에서 목격한 것은 ‘학살 이후의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가자지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고통과 슬픔은 뭉뚱그려진 어떤 ‘거대한 비극’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일상이다. 처음 평화운동 단체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는 강정마을이나 소성리, 오키나와 등 기지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었다. 호전적인 군사정책을 비판하고, 비군사적 방안으로 평화를 이루자 주장하고, 살상무기 거래를 반대하는 등의 활동이 너무 큰 것처럼 느껴져서 막막할 때가 있다. 너무 당연하고 어쩌면 소박한 말일 수 있지만, 평화운동이 기대야 하는 건 절대 추상적일 수 없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일상이어야 함을 새삼 되새겼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 첫 날 받았던 한베평화재단 후원가입서를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