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úng Tôi 가 Chúng Ta가 될 수 있을까?
김승대(평화기행 참가자)
Tân Sơn Nhất 국제 공항의 긴 입국수속장을 빠져나오자 후텁지근한 더위와 오토바이 매연이 가득한 도시, 호찌민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진부한 동남아 날씨에 대한 표현도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한국의 여름이 베트남의 날씨보다 더 더워지게 되면서 수명을 다 해버린 표현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오토바이는 많았고, 예전보단 훨씬 더 교통 인프라가 나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베트남은 나에게 특별한 나라이고 호찌민시는 더욱더 각별하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호찌민으로 이민을 와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고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있고 유년기의 많은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대학교를 오게 된 계기로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 편엔 언젠가 너무 늦기 전에 다시 베트남에 가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베트남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가족이 베트남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많지 않아 이제 베트남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에겐 고향 같은 곳이고 또 아무리 최근 급변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심적으로 친근한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에 살았던 경험 이외에도 베트남과 나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연결 지점은 바로 아버지이다. 사실 아버지는 나에게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항상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가 떠올랐다. 언제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게 허풍과 과장을 섞어가며 매번 이야기하실 때마다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허풍쟁이 이야기꾼.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렇게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많지 않은 당신께서 젊으셨을 시절의 ‘사실’ 중 하나는 당신께서 베트남 참전군인이셨다는 것이었다. 비록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가던 말미에 후방 지원부대로 참전하셨지만,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것만은 여전한 사실이다.

이번 평화기행은 그 시작부터 느낌이 매우 달랐다. 참전군인을 아버지로 둔 한국인으로서, 또 과거에 베트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사람으로서 나의 과거를 다시 되짚어보는 느낌도 들었고, 익숙한 곳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테마로 돌아보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한베평화재단을 설립 당시부터 알고 있었고, 또 이후 여러 번의 평화기행 모집글과 후기를 보며 언젠가 나도 이 기행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지만, 그 결심이 실행으로까지 옮겨지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매일매일을 짓누르는 일상의 무게와 지리멸렬함으로 인해 시간과 여유를 내기가 어려운 점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뭔가 내가 이 여행을 가기에 ‘준비’가 필요할 것만 같은 느낌이 앞섰고 항상 그때마다 한두 마디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막연히 내가 ‘준비’가 덜 된 느낌이어서 망설였다. 하지만 몸과 마음과 여건이 다 준비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평생 이 기행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늦기 전에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관련된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내가 살던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내가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베트남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다 보니 결국 가장 근래의 일이고 또 20세기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인 베트남 전쟁에 관한 자료가 가장 많고 또 풍성했다. 그중에서도 미국(서방)의 시점에서 쓰여지지 않은,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전쟁 외에도 그 내면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 일들을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이 갔다.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보며 읽던 중 한겨레21에서 과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특집으로 다뤘던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출판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들을 검색하던 중 당시 신간이었던 고경태 기자의 퐁니 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을 다룬 책을 보게 되었다. 충격이라기보단 ‘한국군도 예외는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참전군인이 그렇게 생각해 왔듯이, 또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생각하듯이 아버지의 베트남전에 관한 생각도 나이브한 편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이 동남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한국군들도 큰 희생을 치러가면서 싸워’줬’는데 남베트남 정권이 부패하고 무능해서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도 졌다며, 진 것은 남베트남 정부이지 미국이 아니고 미국은 그저 남베트남 정부 지원에서 발을 뺀 것뿐이고 한국군은 그런 미국을 도와주는 위치였지 어떤 것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 처지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를 할수록 사건의 진실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직접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호찌민에서는 남부여성박물관과 전쟁증적박물관, 별동대박물관 등 박물관 위주로 탐방을 했다면 중부지방에 가서 이번 기행의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첫 시작이 퐁니·퐁녓 마을의 위령비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어서 더 뜻깊었다. 위령비까지 가는 길 내내 참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탁 트인 논밭의 풍경과 흙냄새가 과거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대조적으로 느껴져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처음으로 직접 마주한 거대한 비극의 기록 앞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저 참담함을 느끼며 조용히 향을 피우고 헌화를 하고 묵념했다. 이후 방문했던 빈호아의 위령비나 하미 위령비에서도 자주 보이는, 유난히 눈에 뜨이던 단어는 생년 순서로 적힌 희생자 명단 가장 끝에 학살 당시 0 - 3 살이었던 vô danh이라는 이름들이었는데 ‘무명’이라는 의미로 태어나서 아직 이름이 지어지기도 전에 학살을 당했다. 위령비에서 걸어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버스가 주차된 공간 앞에 반짝이던 피자헛과 KFC, 코카콜라 등의 광고판이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 위화감을 더 느끼게 했다.
위령비 근처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관리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관리를 하는 것에 비해 풀이 너무 빨리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일상에 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단순히 과거의 일로 치부되고 잊혀가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더욱더 능동적으로 기억을 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며칠, 몇 시간을 머물다가 떠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한 마을의 모습이 송두리째 달라진 비극 앞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계속 되뇌게 되었다. 이번 기행이 단순히 일회성 이벤트에 끝나지 않고 내가 한국에서, 또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여행 내내 계속되던 생각이었다.

퐁니·퐁녓 마을의 위령비 참배 이후 당시 사건의 피해 생존자이신 응우옌 티 탄 님과 쩐 반 지옙 님을 만났다. 위령비를 참배할 때부터 마음이 복잡했는데 직접 피해 생존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다니 더 마음이 어려워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활동가들의 사전 안내가 있었지만,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또 나는 어떤 질문을,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를 만남으로써 그때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이야기 하게 만드는 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들 앞에서 나서서 잘 이야기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때 이 이야기를 직접 피해 생존자분들께 해드리고 싶었다. 통역을 해주시는 활동가분이 계셨지만 직접 베트남어로 내가 전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베트남에 살아서 너무나도 친숙한 나라인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고, 아버지가 참전 군인이셨는데, 아버지는 한국군의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셨는데 대신 사과를 드리고 싶었다고. 직접 와서 만나 뵙고 싶었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죄송하다고.
어려운 마음의 시간들이 흐르고 준비해 온 선물들을 드리며 여행 참가자 한 명씩 개인적으로 탄 선생님과 지옙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 때 탄 선생님께서 베트남어를 잘한다며 마음속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사실 그때 울컥 복받치는 감정이 들었지만, 피해자분들이 앞에 있는데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뭐라고 운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항상 먼저 손을 내밀고 이해하려고 하는 쪽은 피해자 쪽인가? 위로와 사과의 인사를 전하러 간 쪽은 우리였는데 더 환대를 받는 건 오히려 우리 쪽이었다.

하미 마을을 방문했을 땐 위령비 참배 후 조별로 흩어져 피해자/유가족 댁을 개별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응우옌 티 본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한 후 행정소송을 하고 계신 상태였다. 역시나 어려운 마음으로 선생님 댁에 도착했는데 너무나도 기쁘게 우리를 맞이해주셨고 , 녹차와 수박을 내어주시며 자식, 손자들 대하듯이 많이 먹으라고 하시는 모습에서 마음이 많이 열린 상태로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게 느껴지는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6살이었던 자신이 60세가 넘게 되었다며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시고 한국에 방문하고 싶지 않냐는 우리의 질문에 처음엔 건강이 좋지 않다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셨지만, 같이 행정소송 중인 응우옌 티 탄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며 서울에 오시면 우리가 반겨주겠다고 계속 말씀을 드리자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피력하셨다. 그저 빈 호의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 약속을 지켜 우리를 환대해 주셨던 것처럼 서울에서 우리가 본 선생님을 환대하며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베트남전 하미학살 조사 관련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었고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라 조금 더 희망에 찬 약속이었다 (기행단 귀국 후인 2025년 8월 13일 재판부는 관련하여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기본법은 외국인을 위해 확대 적용될 사안이 아니라며 결국 위원회가 내거는 진실과 화해의 가치가 ‘국내용’임을 드러냈다. 베트남어에는 ‘우리(we)’를 뜻하는 2가지 종류의 대명사가 존재한다. Chúng tôi는 듣는 화자를 제외한 ‘우리 (exclusive ‘we’)’, Chúng ta 는 듣는 화자를 포함한 ‘우리( inclusive ‘we’)’. 문득 우리는 언제쯤 chúng tôi 에서 chúng ta 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제 한국도 다문화, 다인종 같은 말이 어떤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성큼 다가온 현실인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거창한 개념들이 아니더라도 역사와 진실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가 아닐까? 현실의 벽이 높다고 하지만 피해 생존자들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 내내 했던 고민들을 아직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글 | 김승대(평화기행 참가자)
사진 | 라니, 아침, 김승대
Chúng Tôi 가 Chúng Ta가 될 수 있을까?
김승대(평화기행 참가자)
Tân Sơn Nhất 국제 공항의 긴 입국수속장을 빠져나오자 후텁지근한 더위와 오토바이 매연이 가득한 도시, 호찌민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진부한 동남아 날씨에 대한 표현도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한국의 여름이 베트남의 날씨보다 더 더워지게 되면서 수명을 다 해버린 표현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오토바이는 많았고, 예전보단 훨씬 더 교통 인프라가 나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베트남은 나에게 특별한 나라이고 호찌민시는 더욱더 각별하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호찌민으로 이민을 와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고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있고 유년기의 많은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대학교를 오게 된 계기로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 편엔 언젠가 너무 늦기 전에 다시 베트남에 가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베트남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가족이 베트남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많지 않아 이제 베트남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에겐 고향 같은 곳이고 또 아무리 최근 급변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심적으로 친근한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에 살았던 경험 이외에도 베트남과 나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연결 지점은 바로 아버지이다. 사실 아버지는 나에게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항상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가 떠올랐다. 언제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게 허풍과 과장을 섞어가며 매번 이야기하실 때마다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허풍쟁이 이야기꾼.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렇게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많지 않은 당신께서 젊으셨을 시절의 ‘사실’ 중 하나는 당신께서 베트남 참전군인이셨다는 것이었다. 비록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가던 말미에 후방 지원부대로 참전하셨지만,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것만은 여전한 사실이다.
이번 평화기행은 그 시작부터 느낌이 매우 달랐다. 참전군인을 아버지로 둔 한국인으로서, 또 과거에 베트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사람으로서 나의 과거를 다시 되짚어보는 느낌도 들었고, 익숙한 곳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테마로 돌아보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한베평화재단을 설립 당시부터 알고 있었고, 또 이후 여러 번의 평화기행 모집글과 후기를 보며 언젠가 나도 이 기행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지만, 그 결심이 실행으로까지 옮겨지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매일매일을 짓누르는 일상의 무게와 지리멸렬함으로 인해 시간과 여유를 내기가 어려운 점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뭔가 내가 이 여행을 가기에 ‘준비’가 필요할 것만 같은 느낌이 앞섰고 항상 그때마다 한두 마디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막연히 내가 ‘준비’가 덜 된 느낌이어서 망설였다. 하지만 몸과 마음과 여건이 다 준비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평생 이 기행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늦기 전에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관련된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내가 살던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내가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베트남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다 보니 결국 가장 근래의 일이고 또 20세기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인 베트남 전쟁에 관한 자료가 가장 많고 또 풍성했다. 그중에서도 미국(서방)의 시점에서 쓰여지지 않은,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전쟁 외에도 그 내면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 일들을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이 갔다.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보며 읽던 중 한겨레21에서 과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특집으로 다뤘던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출판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들을 검색하던 중 당시 신간이었던 고경태 기자의 퐁니 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을 다룬 책을 보게 되었다. 충격이라기보단 ‘한국군도 예외는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참전군인이 그렇게 생각해 왔듯이, 또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생각하듯이 아버지의 베트남전에 관한 생각도 나이브한 편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이 동남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한국군들도 큰 희생을 치러가면서 싸워’줬’는데 남베트남 정권이 부패하고 무능해서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도 졌다며, 진 것은 남베트남 정부이지 미국이 아니고 미국은 그저 남베트남 정부 지원에서 발을 뺀 것뿐이고 한국군은 그런 미국을 도와주는 위치였지 어떤 것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 처지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를 할수록 사건의 진실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직접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호찌민에서는 남부여성박물관과 전쟁증적박물관, 별동대박물관 등 박물관 위주로 탐방을 했다면 중부지방에 가서 이번 기행의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첫 시작이 퐁니·퐁녓 마을의 위령비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어서 더 뜻깊었다. 위령비까지 가는 길 내내 참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탁 트인 논밭의 풍경과 흙냄새가 과거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대조적으로 느껴져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처음으로 직접 마주한 거대한 비극의 기록 앞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저 참담함을 느끼며 조용히 향을 피우고 헌화를 하고 묵념했다. 이후 방문했던 빈호아의 위령비나 하미 위령비에서도 자주 보이는, 유난히 눈에 뜨이던 단어는 생년 순서로 적힌 희생자 명단 가장 끝에 학살 당시 0 - 3 살이었던 vô danh이라는 이름들이었는데 ‘무명’이라는 의미로 태어나서 아직 이름이 지어지기도 전에 학살을 당했다. 위령비에서 걸어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버스가 주차된 공간 앞에 반짝이던 피자헛과 KFC, 코카콜라 등의 광고판이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 위화감을 더 느끼게 했다.
위령비 근처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관리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관리를 하는 것에 비해 풀이 너무 빨리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일상에 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단순히 과거의 일로 치부되고 잊혀가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더욱더 능동적으로 기억을 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며칠, 몇 시간을 머물다가 떠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한 마을의 모습이 송두리째 달라진 비극 앞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계속 되뇌게 되었다. 이번 기행이 단순히 일회성 이벤트에 끝나지 않고 내가 한국에서, 또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여행 내내 계속되던 생각이었다.
퐁니·퐁녓 마을의 위령비 참배 이후 당시 사건의 피해 생존자이신 응우옌 티 탄 님과 쩐 반 지옙 님을 만났다. 위령비를 참배할 때부터 마음이 복잡했는데 직접 피해 생존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다니 더 마음이 어려워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활동가들의 사전 안내가 있었지만,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또 나는 어떤 질문을,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를 만남으로써 그때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이야기 하게 만드는 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들 앞에서 나서서 잘 이야기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때 이 이야기를 직접 피해 생존자분들께 해드리고 싶었다. 통역을 해주시는 활동가분이 계셨지만 직접 베트남어로 내가 전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베트남에 살아서 너무나도 친숙한 나라인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고, 아버지가 참전 군인이셨는데, 아버지는 한국군의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셨는데 대신 사과를 드리고 싶었다고. 직접 와서 만나 뵙고 싶었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죄송하다고.
어려운 마음의 시간들이 흐르고 준비해 온 선물들을 드리며 여행 참가자 한 명씩 개인적으로 탄 선생님과 지옙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 때 탄 선생님께서 베트남어를 잘한다며 마음속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사실 그때 울컥 복받치는 감정이 들었지만, 피해자분들이 앞에 있는데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뭐라고 운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항상 먼저 손을 내밀고 이해하려고 하는 쪽은 피해자 쪽인가? 위로와 사과의 인사를 전하러 간 쪽은 우리였는데 더 환대를 받는 건 오히려 우리 쪽이었다.
하미 마을을 방문했을 땐 위령비 참배 후 조별로 흩어져 피해자/유가족 댁을 개별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응우옌 티 본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한 후 행정소송을 하고 계신 상태였다. 역시나 어려운 마음으로 선생님 댁에 도착했는데 너무나도 기쁘게 우리를 맞이해주셨고 , 녹차와 수박을 내어주시며 자식, 손자들 대하듯이 많이 먹으라고 하시는 모습에서 마음이 많이 열린 상태로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게 느껴지는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6살이었던 자신이 60세가 넘게 되었다며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시고 한국에 방문하고 싶지 않냐는 우리의 질문에 처음엔 건강이 좋지 않다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셨지만, 같이 행정소송 중인 응우옌 티 탄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며 서울에 오시면 우리가 반겨주겠다고 계속 말씀을 드리자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피력하셨다. 그저 빈 호의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 약속을 지켜 우리를 환대해 주셨던 것처럼 서울에서 우리가 본 선생님을 환대하며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베트남전 하미학살 조사 관련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었고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라 조금 더 희망에 찬 약속이었다 (기행단 귀국 후인 2025년 8월 13일 재판부는 관련하여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기본법은 외국인을 위해 확대 적용될 사안이 아니라며 결국 위원회가 내거는 진실과 화해의 가치가 ‘국내용’임을 드러냈다. 베트남어에는 ‘우리(we)’를 뜻하는 2가지 종류의 대명사가 존재한다. Chúng tôi는 듣는 화자를 제외한 ‘우리 (exclusive ‘we’)’, Chúng ta 는 듣는 화자를 포함한 ‘우리( inclusive ‘we’)’. 문득 우리는 언제쯤 chúng tôi 에서 chúng ta 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제 한국도 다문화, 다인종 같은 말이 어떤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성큼 다가온 현실인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거창한 개념들이 아니더라도 역사와 진실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가 아닐까? 현실의 벽이 높다고 하지만 피해 생존자들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 내내 했던 고민들을 아직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글 | 김승대(평화기행 참가자)
사진 | 라니, 아침, 김승대